<大自由とは何か>
あらゆる苦悩と束縛の中で自由を見つけたいというのは、すべての人の共通の願望である。何千年も続いてきた様々な宗教や「道」という名のもとに行われてきたあらゆる修行も、結局、根本はそこにある。しかし、まだその方法について悟った人はほとんどいない。何らかのきっかけや不断の努力によって一時的な自由を得た人は少なくないが、永遠に続く大自由の境地に至るのは難しいということだ。これは、問題の本質である大自由に対する概念が不足しているためである。
大自由とは、一切の煩悩が断ち切られた本来の性質の状態をいう。私たちが生きているこの現象界は、ただ絶対世界が投影された相対世界である。鏡にある物が映った時、本質は物であって鏡の中の物ではない。同様に、相対世界は絶対世界の顕現に過ぎず、それ自体に意味を持たない。相対世界に存在するすべてのものは本質ではない。
これには、私たちが全く疑わなかった「私」という存在も含まれる。人が夢を見るとき、夢の中にも「私」という主人公が登場する。そして夢の中の私は、現実では会えない人に会ったり、不可能なことを実現させたりと、明らかに現世とは異なる姿で登場する。しかし、夢から覚めるまで、夢の中の私が現実の私と違うという事実を認識することは難しい。同様に、私たちが現実だと考えている現象界、つまり相対世界の私も夢の中の私と同じように虚像に過ぎない。本質ではないからだ。夢を見ながらそれが夢であることを知らないように、現象界にいる間、この「私」が虚像であることに気づかないだけだ。悪夢を見ている間、夢の中の私はとても苦しむ。しかし、悪夢から目覚めた瞬間、それが無駄な恐怖に過ぎなかったことに気づく。相対世界の私もまた、様々な束縛と煩悩に苦しんでいる。これも絶対世界から見れば虚像に過ぎない。この絶対世界の「真我」である本来の性質に気づくことが大自由である。
歴有史以来、数多くの人々が大自由を見つけることを渇望したが、完全な悟りを体得して大自由人になることは非常に困難であった。その理由は、悟りに達することができる正確な方法を提示してくれる真の師に会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からである。 人生において拘束された私たちの生活を解決し、大自由を享受できる真理を悟るために正しい道を教えてくれる師匠との出会いは、あまりにも重要な問題である。
真の師に会うためには、まず心を空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問題は、現代人はあまりにもエゴが強いということである。長い間、自分なりに定立した教義の真理システムが固定観念になり、強く心の中に埋め込まれ、それはまた別のエゴを形成する。子供のように純粋な人にとっては、真理とはあまりにも単純で簡単なのだ。人間の複雑な頭脳のせいで、むしろ悟りは妨げられる。本来の自己を悟るためなら、分かりにくい多くの用語が何の役に立つというのだろうか。ひたすら「現象界に存在するすべてのものには、独立した人格としての『私』というものはない」という事実を胸に体得し、あらゆる是非の弁別がなくなった中道に留まったときに、これ以上の '私' という錯覚に陥らない状態、すなわち「無我」を悟ることができる。
全体的な森と部分的な木を同時に見ることができる眼識を持っていなければ、真理を正しく見ることはできない。この段階になると、実際の修行を通して自己への執着が手放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すべてのことについて、是非を弁別する心が消えなければならない。その時に初めて、内外で起こっては消えるすべての現象をありのまま眺め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そうなれば、一切縛られこともない状態で、「無我、すなわち本来から私というものはない」ということが体得できる。しかし、実際のところ、現代の求道者たちは、あまりにも残念な状態に置かれている。現代文明の複雑さとエゴを満たしてくれる世俗の楽しさが随所に敷かれており、多くの人々がその泥沼で踠いているため、真理に目を向ける余裕がない。たとえこの世の富と権力や名誉の空虚に気づき、求道の世界に飛び込んだとしても、状況はそんなに甘くないだろう。真理を見つけるのは、広い砂浜で針を探すよりも大変なことだからだ。数千年を伝えてきた伝統ある既存の宗教でも、新しい時代の新しい気運を受けて出てきた新興宗教でも、エゴをさらに強化させる点では同じである。
既に極めて歪曲されてしまった混沌の時代に、どのように明るい目と開かれた耳を取り戻すことができるのか。
ただ、縁があるのみだ。
今や時が来て大切な縁に出会うことができ、真理が世の中の光を見るに至った。実にありがたいことである。
<대자유란 무엇인가>
온갖 고뇌와 속박 속에서 자유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열망이다.
수천 년을 이어 온 각종 종교나 ‘도’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모든 수련들도 결국 근본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방법을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계기나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일시적인 자유를 얻은 사람은 적지 않겠지만 영원히 지속되는 대자유의 경지에 오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이것은 문제의 본질인 대자유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자유란 일체의 시비분별이 끊어진 본래성품의 상태를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상계는 단지 절대세계가 투영된 상대세계일 뿐이다.
거울에 어떤 사물이 비쳤을 때, 본질은 사물이지 거울 속 사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상대세계는 절대세계의 현현일 뿐,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상대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본질이 아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나’라는 존재도 포함된다.
사람이 꿈을 꿀 때 꿈속에서도 ‘나’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꿈속의 나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거나 불가능한 일을 실현시키는 등, 분명히 현상계와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꿈을 깨기 전까지 꿈속의 나가 현실의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현상계, 즉 상대세계의 나 또한 꿈속의 나처럼 허상일 뿐이다.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현상계에 있는 동안 이 ‘나’가 허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악몽을 꾸는 동안 꿈속의 나는 무척이나 괴로워한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어나는 순간 부질없는 두려움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된다.
상대세계의 나 또한 온갖 속박과 번뇌에 괴로워한다.
이 역시 절대세계에서 보면 허상일 뿐이다.
이 절대세계의 ‘참나’인 본래성품을 알아차리는 것이 곧 대자유다.
역사 이래로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자유 찾기를 갈망하였으나 완전한 깨달음을 체득하고 대자유인이 되기는 너무 힘이 들었다.
그 이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정확한 방법을 제시해 주는 참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구속된 우리의 삶을 해결하고 대자유를 누릴 수 있는 참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바른길을 알려줄 스승과의 만남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다.
참 스승을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비워져 있어야 한다.
문제는 현대인들이 너무나 에고가 강하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자기 나름대로 정립해 놓은 교리적 진리 체계가 고정관념화되어 너무도 강하게 마음속에 박혀 있어서 그것이 또 다른 에고를 형성하고 있다.
참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에게는 진리란 너무나 단순하고 쉬운 것이다.
인간의 복잡한 머리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이 방해를 받는다.
본래성품을 깨닫는데 알아듣기도 힘든 그 많은 용어들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오로지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는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나’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체득하여 일체 시비분별이 끊어진 중도(中道)에 머물 때, 더 이상 ‘나’라는 착각에 빠지지 않는 상태 즉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
전체인 숲과 부분인 나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추어져야만 진리를 바르게 볼 수 있다.
이 단계가 되면 이제는 실수행을 통해서 자아에 대한 집착이 끊어져야 하고 모든 것에 대해 시비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체 매이는 바 없는 여여한 상태에서 “무아-본래 나라는 것은 없다.”를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현대의 구도자들은 너무도 안타까운 상태에 처해있다.
현대 문명의 복잡성과 에고를 충족시켜주는 세상적 재미가 도처에 깔려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느라 참 진리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
설사 세상의 물질과 권력 그리고 명예의 허망함을 알고 구도의 세계에 뛰어든다 해도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참 진리 찾기가 드넓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미 왜곡될 대로 왜곡되어버린 혼돈의 시대에 어떻게 밝은 눈과 열린 귀를 찾을 수 있을까. 오직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제 때가 되어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되어 진리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無為海空-
約26年間、東洋と西洋の宗教および哲学を往来しながら修行。
1998年12月、ミャンマーのマハシセンターで無我縁起の悟りを開く。
その後、「海空瞑想センター」で教えている。
-무위해공-
26여 년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을 넘나들며 수행.
1998년 12월, 미얀마 마하시 센터에서 무아연기의 깨달음이 드러남.
그 후 “해공명상센터”에서 가르침을 펼치고 있음.